▲이정기 목사(신나는교회)
휴가기간에 가족들과 함께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감동의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이순신 장군의 대사가 며칠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독버섯처럼 퍼져있는 두려움이다. 만일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 큰 용기로 증폭되어 나타날 것이다. ” 감독이 이 영화에서 무엇에 집중하고자 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사였다.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마저 불타버린 상황에서 육지로 도망치려는 부하들을 바닷가에 모아놓고 병영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육지라고 안전 할 것 같더냐. 우리에겐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이제 우리가 죽을 곳은 바다 뿐이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죽기를 작정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살고자 애쓰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싸우면서 같이 죽자는 말이었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상대해야하는 전투에서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고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 또한 두려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단 12척의 배였지만, 이미 임진왜란을 백전백승으로 이끌었던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간파한다. 그래서 바다를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어명에도 ‘바다를 버리면 조선을 버리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이렇게 답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한, 적들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그러면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능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봤을 때 이순신 장군의 `용기'는 정말 무모했다. 왕이 가장 먼저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시국에 배 12척으로 330척에 맞서 싸우자고 했으니 그 논리에 설득당할 바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당시 명량해전에 나섰던 조선수군은 이순신의 지시를 따르는 척하면서 도망칠 기회만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 만이 최선두에서 적선과 맞써 싸우는 `이상한 그림' 연출된 것이다. 그런데 1척으로 수많은 적선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조선수군은 감동한다. 두려움이 용기로 바뀐다. 그리고 승리한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승리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승리를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우리안에 존재하는 두려움은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능력과 은사와 탈란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묶어 놓는다. 그러면 두려움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고, 하나님이 찾을실 때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두려움은 죄로 시작된 것이다. 두려움은 영적인 것이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적인 노력만 가지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압하고 대적하고 물리쳐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왕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가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두려움에 휩싸여 무너지는 장면이 나온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다.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한꺼번에 처단하고, 3년동안 내리지 않았던 하늘에서 기도하여 비가 내리게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담대했던 엘리야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려도 좋다.’<왕상19:2>  이 한 마디 말에, 그렇게 담대하고 당당했던 엘리야가 잔뜩 겁을 먹고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죽기를 바라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엘리야를 삼켜버린 것이다. 두려움이 엘리야에게 있던 담대함과 믿음마저 묶어버린 것이다.

그 시간 이후 하나님은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세우신다. 엘리사와 예후였다. 그들에게는 이세벨의 위협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예후가 이세벨을 죽였고, 아합의 아들 70명을 제거하고, 이스라엘 전역의 바알 숭배자들을 제거했으며, 신당에 있던 목상들을 불태우고, 신당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리고 나서 예후가 못다한 일은 엘리사가 해결했다.

출애굽기 14장에 출애굽하여 해방된 감격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곧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와 꿈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자기 불행이 찾아온다. 바로가 병거 600승과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왔기 때문이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은 분명히 한계상황이었고, 진퇴양난의 위기였다. 길이 없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10절을 보면 심히 두려워한다. 왜 심히 두려했나?  바로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애굽 사람들이 뒤에 이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꼼짝없이 몰살 당할 수 밖에 없는 위기 앞에서 그들은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세는 똑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애굽의 군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선을 바꾸어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본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라는 말씀이다. 누구나 현재의 상황만 바라보면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낙심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모세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자. 가나안땅을 바라보자. 그러면 두려움이 용기로 바뀔 것이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을 누가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길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추격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어떤 목적을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는가?  출애굽기 14장 4절과 18절을 보면 영광을 얻으시려는 계획이 있으셨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선한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일어난 사건을 무조건 좋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축복은 멀리있지 않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면 찾아올 것이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늘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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