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1.5배 밖에 안되는 작은 땅덩어리에 인구 1억 6천만명이 살고 있는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 국가. 경제발전예산의 80%이상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을 만큼 가난해 굶주림이 극심한 곳. 특히나 모슬렘과 힌두교가 99%를 차지해 다른 종교가 발을 들여 놓기 힘든 이 나라 방글라데시에 혈혈단신 여자의 몸으로 들어가 25년 교육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노재인 선교사가 있다. 풋풋한 대학 신입생 때인 1980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민족복음화대성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로 서원한 그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김명혁 목사를 만나면서 방글라데시로 정식 파송 받게 된다. 방글라데시에 영양사가 필요하다는 그의 글을 읽고 찾아가 선교사로 보내줄것을 요청한 것이다. 고국을 잠시 찾은 노 선교사를 만나 그의 삶과 선교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한복협 김명혁 목사가 노재인 선교사 사역지를 방문해 함께 한 모습.(한복협 제공)

대학 1학년 때 선교사 작정...10년후 파송 선교사로

노재인 선교사가 방글라데시와 맺은 인연은 햇수로 25년째다. 대학교 1학년 때 막연하게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고 10년 후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 받아 방글라데시로 향했으니, 그야말로 청춘을 바친 셈이다.

“대학생 때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막막하게 기도하던 중에 ‘방글라데시로 가라’는 메시지를 듣게 됐고, 잘 모르는 나라여서 망설였다. 그러던 중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김명혁 목사님이 발행하는 간행물 속 글을 보게 됐다. 방글라데시를 다녀 온 후 그 곳에 영양사가 너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는 영양사로 헌신할 한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고 6개월가량 기다렸다. 기도하며 지켜봤는데 아무도 헌신하지 않자 ‘이건 나의 소명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김 목사님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열악하고 무더운 지역에 정말 가겠느냐고 여러 번 물어보셨지만 내 마음을 들으시고 파송해 주셨다. 한복협에서 유일하게 파송된 단 한명의 선교사다(웃음)”

노 선교사는 대학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기에 사역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월드릴리프의 모자보건 교육프로그램의 훈련요원으로 가서 쿨라지역(수도 다카에서 330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최빈민가 해당) 마을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영양교육을 했다.

“1990년에 방글라데시에 갔다. 최빈국으로 그 당시 설사, 기아가 심해서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산모, 유아 등도 영향을 받았다. 국민 평균 수명이 40세일만큼 심각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아 주는 가르침이 필수적이었다”

처음에는 영양 교육에 집중했지만, 점차 어린이 학교 교육으로 사역이 옮겨졌다. 노 선교사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마을 어른 중 한 사람이 매우 아팠다. 그래서 수지침을 놔드렸더니 호전 됐다. 그가 마음의 감격을 해서 마을 지도자들을 데려와 소개해주더라. 문맹인 아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들은 ‘당신 안에 있는 빛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들의 세대에는 그 빛을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후손들은 그 빛을 봤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교육은 방글라데시와 하나님을 잇는 다리...평생 사역 할 것

이슬람이 83%, 힌두교가 16%인 나라이기에 노 선교사를 찾은 이들은 이 종교의 지도자들이었다. 알듯 모를 듯 뱉은 ‘빛’이라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인터뷰를 하면서 궁금했다. 노 선교사는 “그들은 내가 기독교인으로 그 땅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갈급이 그만큼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너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21일 오전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노 선교사를 만났다. ⓒ뉴스미션

“그 일을 계기로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선교사로 간지 4년 째 되던 해다. 학교라고 해서거창한 건물이 아니다. 소 외양간, 쓰지 않는 헛간 등을 고쳐서 사용했다. 교사들이 중요했는데 헌신된 사람들이 모아져서 순조롭게 출발했으며, 기독교학교를 표방해 교육했다. 커리큘럼에 기독교 과목을 포함시켜 복음을 전했다. 13~15개 학교를 세워 유치부와 초등부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1천여 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다”

현지에서 기독교 교육을 함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세워달라고 여기저기서 요청받고 있는 고무적인 상황. 특히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도 학교를 세워달라고 할 정도로 노 선교사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신뢰는 크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성향은 겸손하고 부드러워서 중동 지역같이 모슬렘, 힌두교가 많더라도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나 박해는 없다. 오히려 공존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고. 어느 날은 노 선교사가 힌두교 사원 앞을 지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와서 찬송을 가르쳐달라고 즐겁게 달라붙었다. 그래도 타 종교 어른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또한 학교에서 기독교 관련 수업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도 와서 기쁘게 듣고 간다고. 노 선교사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있다. 이는 지금 그가 방글라데시에서 꿈꾸고 있는 비전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의 민족성과 기독교 복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학교가 많이 필요한 상황에서 앞으로 일꾼 키우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 신실한 교사와 봉사자들을 배출해서 그들이 제자를 키워내고 그 제자가 다시 제자를 키우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다. 지금 한국을 오가며 신학원에서 목회학을 공부 중이다. 현지에서 이를 접목할 예정이다”

처음에도 장기 사역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이렇게 청춘을 다 보내며 평생 사역으로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제는 방글라데시가 제2의 고향으로 죽기까지 섬기겠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와 자신도 깜작 놀란다고. 25년 동안 낯선 이들을 가슴으로 품는 모습을 지켜본 현지인들도 이제 그를 꽤 좋아하고 의지하는 듯  하다. 가끔 그가 한국에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은근 슬쩍 질문도 던진다는 것. “그런 질문 받으면 만약에 여기서 죽으면 여기서 묻히고, 한국에서 죽으면 한국에 묻히겠다고 해요”라며, 웃었다. 이제 쉰 중반의 나이가 됐지만, 어린아이들과 함께한 시간 때문인지 웃음은 수줍고 앳된 소녀와 닮았다. 조선 땅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 교육에 매진했던 스크랜턴 여사의 열정과 사랑은 노재인이라는 작은 체구의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방글라데시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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