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규 교수
욥을 보면 솔직한 기도의 좋은 예가 보인다. 필자는 어떤 환경이든지 늘 감사하고 자족하라는 설교를 수도 없이 했다. 불만과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앗아가는 것이기에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가 욥의 기도에서는 산산조각난다. 욥의 기도와 그가 받은 응답은 필자가 전한 항상 감사와 자족하라는 신앙의 원리의 한계와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척 해봐야 병들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허약하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부족한 존재다. 그런 인간이 정말 견딜 수 없는 참담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참으며 비현실적으로 자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려 드는 것은 때론 정신적으로도 병들게 만들 뿐이다. 사실 주변에 보면 일부 기독교인이 감사와 만족에 대한 강박증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 지는 경우가 있다. 나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늘 믿어왔고 결국 참다 참다 폭팔할 때도 있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상황들이 있다. 이럴 때 욥기는 당대의 의인인 욥을 통해서 슬퍼할 때 슬퍼하고 워망할 때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싶으면 비난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도전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솔직한 것, 이것이야 말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다. 그것이 불안과 절망이던 원망이던 상관이 없다. 진짜 나쁜 것은 다 포기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투정하고 보채듯 우리도 그럴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가식이 없어야 한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하나님께 이럴 수는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따졌다. 욥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의인이라지만 욥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욥은 한순간도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의 선하심을 믿은 만큼 하나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원망 투성이었다. 그의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이론적으론 그럴지 몰라도 현실에선 아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고 싶었고 절실하게 하나님을 만나 그 해명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에게 기도는 영혼이 깊은 안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그에게 그런 불행을 당해보지 못한 자들의 사치스러운 헛소리에 불과했다. 죽지도 못하고 겨우 견디는 그에게 기도는 하나님에게 싸움을 거는 자리였다.

하늘에 숨어있지만 말고 한번 나와서 제발 자신에게 답을 해보란 것이다. 그의 기도는 탄식, 간구, 애원까지도 넘어서 있다. 욥의 기도는 인간의 감정이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무섭게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악에 받친 몸부림이었다.

욥의 상황에 필요한 건 위로, 처방을 남발하지 말라

난 그간 힘든 상항에 있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자족하라”는 처방전을 너무 쉽게 남발했다. 물론 이런 요구가 많은 이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이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실제로 욥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자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진짜 나타나셨다. 그리고 욥에게 아니 하나님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 수 있냐고, 불평 불만한 것을 회개하라 촉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고 영광 돌릴 것을 가르치려 들었던 의로운 목회자요 신학자인 친구들을 벌하셨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는데 실패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그의 분노와 고통을 공감해주면서 함께해주는 진실한 친구였다. 욥도 역시 하나님께 혼난다. 그러나 친구들과 달리 벌을 받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조목조목 피조물의 세계 안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들을 나열하시면서 과연 네가 이런 것조차 이해 못 하면서 나에게 무엇을 그리 따지느냐고 하셨다.

하나님의 신비, 원망이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욥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알 수 없음을 인정했다. 어차피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무지를 꾸짖은 것만으로도 그의 원망이 해결됐다. 사실 원망에서 나온 질문인지라 원망이 사라지니 질문도 사라졌다. 질문이 사라지니 답이 필요 없어졌다. 무지에서 나온 그의 불평과 원망, 하나님에 대한 비난은 이제 찬양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고통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넓혔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수준에서 판단하는 선일 뿐이다. 욥은 자신의 시각에서 가장 필요할 때 도움을 외면하고 끝없는 잔인함으로 자신을 괴롭히신 하나님을 체험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은 인간이 기준으로 세운 선과 악,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의 모든 것을 넘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인간의 선과 악을 뛰어넘어 움직이신다. 그래서 때론 인간의 선에 대한 신념조차 산산이 부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상 불가한 신비다. 욥은 체득하였다. 어둠과 고통 속에 자신을 지독한 절망으로 이끌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하여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말이다.

그분의 신비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겪다 보면 삶의 고통과 불공평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분, 아니 가장 신뢰해야 할 분임이라는 진실을 점차 배울 뿐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약한 믿음을 시험하시고 키워 주신다. 진실한 신뢰를 배울 수 있도록. 그래도 하나님 때론 너무 하시다고?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고 미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그래도 살아서 고맙고 끝이 있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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