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교수
예수쟁이 래퍼의 등장

최근 한 케이블 방송에 등장한 크리스천 래퍼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비와이라는 이름의 래퍼는 자신의 신앙고백과 기독교적 메시지를 가사에 담아 랩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기독교 메시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음악 실력을 발휘한 결과, 이 방송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가장 인기 있는 힙합 뮤지션으로 떠올랐다(뉴스미션 7월 21일자 기사 참조).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그의 가사는 재산을 자랑하거나 19금 사랑을 노래하곤 하는 여느 래퍼의 가사와는 확연히 다르다. 종교 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과 가사에 빠져들게 한다.
 
오래 전, 교회에서 기타를 칠 수 있느냐는 문제로 밤새 토론하고 교회 어른들과 씨름을 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요즘에는 교회마다 전자기타로 찬양 반주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강대상과 나란히 드럼 세트가 놓여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필자가 미국 교회를 방문했을 때 상당히 강한 록 음악 풍의 찬양의 찬양을 하는 교회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20여 년 전에 한국 교계에서 록 음악은 매우 세속적이고 심지어 악마적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시간이 많이 지났고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 하더라도 이런 류의 음악으로 찬양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스러울 정도였다. 미국인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성인들이 어린 시절에 즐겨 듣던 음악이 록 음악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친숙한 록 음악에 기반한 찬양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교계에서도 힙합으로 찬양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 논쟁이 있었는데 청소년과 청년층에서는 힙합이 익숙하고 편한 음악 장르이다. 지금의 장년층이 젊었을 때 통기타와 포크 음악을 즐겨 들어서 그런 류의 복음성가를 즐겨 불렀듯이 지금 젊은 층들의 음악은 힙합이라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기존의 것이 편하게 느껴지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위험스럽게 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전통은 슬며시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고 새로운 시도는 종종 이단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교회 악기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피아노조차도 초기에 교회에 들어올 때에는 그 소리가 너무 가볍고 경망스러워서 교회 음악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새인가 교회당 안에 자리 잡게 된 피아노는 개척교회라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악기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는 언제나 문화의 옷을 입는다. 2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근동 지역에서 등장한 기독교는 유럽으로 건너가 서양의 종교가 되었고 이어 범세계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세계 모든 지역의 기독교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지역의 문화와 만나서 나름의 특색을 갖는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낸다. 미국의 기독교와 유럽의 기독교가 같지 않으며 아시아의 기독교는 또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백인 교회공동체와 흑인 교회공동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최근 기독교가 뜨겁게 일어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보통 예배 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고 한다. 1시간 정도로는 예배에 깊이 몰입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들이 민속 종교에서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것을 중요시하듯이 기독교 예배에서도 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북한에 있는 교회가 실제 교회가 아니고 보여주기 위한 위장 교회라고 하지만, 북한에 교회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남한에 있는 교회들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북한에 지하교회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관이 우리 남한 성도들의 신앙관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통일이 되어 남북한 성도들이 함께 만나게 되었을 때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에 반갑기도 하겠지만, 또한 그 신앙의 결이 다름에 적잖이 놀라게 될 것이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은 각각의 문화와 만나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문화 요소를 활용하여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문화적 표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얼마 전 상영되었던 곡성이라는 영화는 그 모호한 내용 때문에 평가가 엇갈렸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결말의 모호성 때문에 매우 불편해했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모호성과 관련하여 다양한 토론을 벌이며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다양한 기독교 코드를 사용하여 기독교 영화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쟁을 일으키어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양상은 다소 다르지만 몇 년 전에 상영되었던 밀양이라는 영화도 기독교인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기독교 테마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로 알려졌는데 영화 내용 중에 교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들이 나와서 반기독교적 영화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현실의 교회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으나 핵심 내용은 매우 기독교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영화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라는 간판을 달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기독교 정신과 가치를 잘 담아내느냐 일 것이다.
 
기독교 문화를 위하여
 
요즘 문화 사역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기독교 내용이 나오면 “기독교적 문화”, 그렇지 않으면 “비기독교적 문화”로 구분 짓는 단순한 이분법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기독교식으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사실은 아주 비기독교적인 문화 상품들도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하는 활동이나 단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기독교의 가치를 잘 담아내고 있고 기독교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할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가 지나치게 표피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문화는 단순히 현상으로 드러난 차원이나 상품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문화는 단순한 오락거리로 치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의 문화 현상은 그 문화 주체들의 생활양식 또는 사고방식의 결과로서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와 관련된 문화 상품이나 문화 예술 행사를 도입하는 것만을 문화 선교로 보는 것은 너무나 폭이 좁은 이해이다.
 
문화 선교를 위해서는 현대인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삶의 방식과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비와이는“종교적인 것을 일부러 보여준다기보다는 저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고 그 결과 종교색이 더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일상에 젖어있는 신앙의 차원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거룩할 뿐 감동을 주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는 요즘 세대들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흔히 말하듯 기성세대는 거시 담론과 종교 앞에서 경건해지지만, 젊은 세대에게 감동 없는 경건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즘 세대에게 종교적 영성이 부족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진리를 찾아 순례하고 있을 것이다. 교회는 각각의 세대가 필요로 하는 것과 그것의 적절한 매개 방식을 찾아서 각 세대와 의사소통하며 그들을 도울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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