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순교한 첫 목회자로 알려진 철원제일교회 강종근 목사. 신사참배를 거부해 죽는 순간까지도, 원수를 사랑하란 예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한 신앙인으로 전해진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를 지킨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돌아본다.
 
▲강종근 목사가 마지막으로 목회했던 철원제일교회 터. 강 목사는 38살의 나이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했다.
 
“모세와 같은 민족의 지도자 필요”…민족의식 불태운 강종근 목사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1942년 6월 3일, 강 목사가 그토록 고대하던 조국의 광복이 3년여 앞둔 시기였다.
 
1904년 평앙남도 강서에서 출생한 강종근 목사는 일본인에게 토지를 약탈당한 부친을 따라 만주 길림성 철령을 이주했다. 이곳에서 강 목사는 민족주의자 최학기 목사(철령 이동교회)를 만나 신앙성장에 힘쓰는 한편, 민족의 독립을 꿈꿨다.
 
강 목사에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배재학당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한 이도 최학기 목사였다. 1925년 3월 배재학당을 졸업한 강 목사는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2의 고향이었던 철령 지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천감리교회, 창도감리교회를 거쳐 1939년 철원제일감리교회의 전신인 철원제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부임한 강 목사는 교인은 물론, 지역주민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목회자였다. 하지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설교를 자주했던 강 목사는 일본 경찰에게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던 1930년대, 강 목사는 교인들에게 우리 민족에게도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모세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설교를 자주 전했다.
 
1941년 12월 8일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일제는 식민지 내부단속을 위해 ‘사상범 예비 검속령’을 실시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일시에 검거해 형무소에 수감시키기 시작했다. 강 목사 역시 교인들에게 반일선동과 신사참배 거부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서재에 있던 모든 책들을 압수당하고 철원경찰서에 수감됐다.
 
모진 고문과 독방에 외롭게 갇혀 있는 가운데서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는 강종근 목사. 쇠약해진 몸으로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강 목사의 죽음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한 목회자들 가운데 첫 순교였다. 강 목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한 진정한 신앙인이었다.
 
가족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을 고문한 경찰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다는 강 목사. 또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을 남겼다.
 
“여보, 나는 주님의 곁으로 갑니다. 절대로 나를 취조하고 감옥에 보냈던 일본 경찰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세요.”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조명 받지 못했던 강종근 목사의 삶과 신앙은 진흥문화 박경진 회장을 통해 빛을 보게 됐다. 박 회장의 전적인 지원 아래 김수진 원장(한국교회역사연구원)이 집필을 맡아 2013년 <신사참배 거부의 첫 순교자, 강종근>을 출간했다.
 
박 회장은 한국교회가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신앙을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어요. 우리는 모든 걸 버리고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총칼도 겁내지 않았던 믿음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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