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로 덮인 수십 구의 주검, 계엄군의 총칼에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온 학생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주기독병원 응급실… 1980년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한국명 허철선·1936~2017)는 ‘5월의 광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기록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며 상처 입은 광주 시민들을 보듬었던 헌틀리 목사가 그의 유언에 따라 광주 선교사묘역에 안장됐다.
 

 ▲17일 오전 10시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유해 일부가 안장됐다. 묘비에는 "나는 용서 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졌다.ⓒ데일리굿뉴스

 

5·18민주화운동 세계에 알린 '숨은 의인'


1936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인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한국 이름은 ‘허철선’이다. 지난 1965년,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회 소속으로 그가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선교 동역자가 지어준 이름이다. 허철선 목사는 1969년부터 1985년까지 광주에서 의료선교를 펼쳤다.

광주 항쟁 중 목격한 계엄군 헬기 사격에 대한 증언을 남긴 아놀드 피터슨 선교사의 공헌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허철선 목사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 목사는 위르겐 힌츠펜터 독일기자, 아놀드 피터슨 미국 선교사 등과 함께 ‘5월의 광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기록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했던 허 목사는 5·18의 참상을 필름으로 낱낱이 기록했다. 계엄군에 끌려가는 시민들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학생들, 시신이 안치된 현장 등 당시 광주의 모습을 수많은 사진으로 남겼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군에 빼앗겼다.

번번이 사진을 압수당하자 허 목사는 아내 마사와 함께 사택의 지하 차고를 개조해 암실을 만들어 사진을 직접 인화했다. 이 사진들은 영화 ‘택시운전사’ 속 실존인물인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기자와 해외 선교사에게 전해져, 전 세계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허 목사는 훗날 펴낸 회고록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때리고 체포했다. 일요일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사람들은 단지 교회 등에 가고 있었을 뿐인데, 영문도 모른 채 폭행을 당한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자기가 맞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고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남도청 진압작전 전날이었던 5월 26일, 광주를 재점령하려는 계엄군의 작전을 미리 안 미국 정부는 헬기를 동원해 선교사와 가족들을 미공군 기지로 이동시키려고 했지만, 허철선 목사와 피터슨 목사,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광주에 남기로 결심했다.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광주의 참혹한 현장을 수일간 목격했고, 더군다나 허 목사 부부에게는 당시 불과 10살이었던 막내딸 제니퍼를 포함해 어린 자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 국적의 성직자였던 자신들조차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 목사는 “10여 년을 섬긴 광주와 상처입은 시민들을 남겨놓고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광주에 남았다.

계엄군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외부와 모든 교통·통신이 단절된 광주… 하지만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는 '광주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내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허 목사는 진실을 전하는 언론의 역할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다.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던 허 목사는 수많은 외신 기자들의 취재를 돕고, 통역과 인터뷰를 하며 광주 시민들의 입이 되었다. 광주 남구 양림동의 붉은 벽돌집, 허철선 목사의 사택은 1980년 5월 당시 광주의 참상을 취재하려고 모여든 외신기자들의 사랑방이자 기자실이었다. 


30년 동안 기자로 일했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도 보도문을 작성하는 등 광주 항쟁의 진실을 밝히는 데 힘을 보탰다. 그녀는 "당시 코리아 타임스와 코리아 헤럴드, 미국 남장로교 월간지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칼럼을 여러 차례 기고했지만, 단 한 차례도 실리지 않았다"며 "생전에 허철선 목사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변화된 한국의 모습을 보고 특히 기뻐했다"고 말했다.

 

 ▲17일 오전 8시 헌틀리 목사가 17년 동안 일했던 광주기독병원에서 그의 유가족과 병원 임직원들이 추모예배를 드렸다.ⓒ데일리굿뉴스

 

광주에 잠든 허철선 목사..."5• 18 역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

허 목사 부부는 1985년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로 추방 당했다. 하지만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들은 '십자가의 도시', 광주를 잊지 못했다. 지난해 허철선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방문이었던 1995년까지, 부부는 광주를 수차례 방문했다.

민주화에 헌신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하는 2017년 '제11회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로 허 목사가 선정되면서 그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허 목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허 목사 부부는 제자인 홍장희 목사를 통해 오월어머니상을 전해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허 목사는 그로부터 한 달 뒤, 향년 81세를 일기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생을 마치기 전, 고인은 가족에게 ‘광주에 가고 싶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유가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유골 일부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17일 오전 8시 허철선 목사가 17년 동안 재직했던 광주기독병원에서는 그의 유가족을 비롯해 병원 임직원 200여 명이 참석한 추모예배가 드려졌다. 유가족은 부인 마사 헌틀리와 큰딸 메리, 셋째딸 제니퍼와 사위, 손자 등이 참석했다.

허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는 “광주기독병원을 지켜온 여러분들의 수고에 격려와 감사를 보내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축복하고 싶다"며 "허철선 목사는 무엇보다 즐겁게 선교할 것을 강조했다. 의료선교사인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돌보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예배당을 나온 유가족들은 양림동 선교사 묘역으로 이동했다. 호남신학대학교에 위치한 선교사 묘역에는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한국명 서서평) 선교사 등 양림동 일대에서 사역을 했던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다. "나는 용서 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진 허철선 목사의 묘비도 이곳에 세워졌다.

 

마사 헌틀리 여사는 "허철선 목사는 1909년부터 한국전쟁까지 개성에 살았던 그의 삼촌에게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으며 자랐고, 이는 그가 한국을 콕 집어서 선교를 오게 된 이유였다"며 "허 목사는 한국과 한국 사람들, 그리고 한국어를 너무나 사랑했다. 항상 한국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하며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한 것이 정말 좋았다고 했다"며 그를 회고했다. 

 

그녀는 특히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마사 헌틀리 여사는 "기자는 한국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서 "진실과 정의는 기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진실만을 말할 것을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허철선 목사는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광주의 마지막 선교사였다. 그는 총성과 죽음이 오가는 도시 한 가운데서 머나먼 타국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참된 목자였다. 광주를 뜨겁게 사랑했던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허철선 목사'는 광주의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광주의 마지막 선교사였던 고(故) 허철선 목사. 지난해 제자 홍장희 목사를 통해 '제11회 오월어머니상'을 전해 받은 생전의 모습.ⓒ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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